광주왕실백자 :
근대적 계승

광주 왕실 백자 지평도예 250년

한국의 전승도자는 경기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확장됐다.

 경기도 광주는 조선 시대 왕실의 사옹원 분원이 설치, 운영되면서 왕실용 진상 자기를 생산하는 백자생산의 중심지였다. 조선백자는 왕조의 통치 이념을 그릇에 구현한 왕실 전용 자기로 세조 연간 설치된 사옹원 분원에서 관영 수공업 체제하에 생산되었으며1), 분원의 경영은 왕실이 직접 관장하였고, 이는 1884년까지 지속한다.

 조선 왕실은 도자기 생산에 높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왕실이 직접 분원을 경영함은 물론 사옹원의 최고 책임자인 사옹원 도제조와 제조를 왕자2), 종친들이 주로 맡아 왕실의 백자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 준다. 이후 왕실은 유교의 정신을 담은 조선만의 백자 문화를 만들어 냈고 일반 사대부 계층과 더불어 백자의 양식변화를 주도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위치에 근접해 있었다.3)

「신동국여지승람」, 토목조 광주목

「경고명승도첩」, 우천(牛川, 분원 관요), 겸재 정선, 간송미술관 소장

 실의 관심과 배려로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던 분원은 후기에 들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왕실의 재정이 불안해지고, 명나라의 멸망으로 청화 안료의 수입이 어려워져 광해군 대에 이르러 철화백자라는 독특한 백자를 만들어 낸다. 이후 조선 후기 청나라로부터 수입자기가 들어오고 1773년 무렵 영조의 사치 금지령이 공표되면서 중앙양반과 왕실이 원하는 백자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주 소비층을 잃게 된다. 이렇게 호응을 얻지 못한 분원은 점차 쇠락하고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고종 대에 이르러 1884년『분원공소자기절목』이 공표되면서 왕실의 품을 떠나 민영화에 접어든다.

경기 광주지역 가마터

선 후기 사옹원 분원 공방 구조

 이 와중에도 분원은 의례용 왕실용 자기와 함께 민간판매용 자기를 만들어 잠깐 부흥기를 맞이하지만 관영 수공업이라는 오랜 생산체계의 한계로 인해 운영 주체가 여러 번 바뀌다가 1910년 초 경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 분원 소속 장인들은 일부는 이왕직 미술품제작소와 조선미술품제작소 등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분원의 해체 이후 장인들은 광주지역을 떠나 흩어졌고 광주분원 관요의 백자 제작은 끝이 나게 된다. 명맥을 이어오던 제작 장인들도 가내수공업 형태로 광주지역에서 자기 생산을 이어 간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후 광주지역 자기 생산의 복원을 위한 일부 움직임4)이 있었으나, 이 역시 경영난 등으로 중단되었고 1950년대 말까지 광주지역의 자기 생산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1960년대 들어 광주는 일제강점기 자기 생산에 참여한 장인들의 일부가 지역으로 돌아와 공방을 개설 하면서 당시 경기도 이천과 함께 자기 생산지로 주목받게 된다. 이와 함께 근대부터 지속한 청자재현작업이 다시 시작되는데 광주지역의 경우 백자와 분청사기 제작자들이 돌아와 전승 자기재현작업을 시작하게 되고 나아가 대규모 분업화 된 공방으로 발전 한다. 이들은 숙련된 장인들의 기술을 기반으로 과거 조선백자를 해체하고 현재화하는 전승 자기제작에 몰입하였고 이들을 시작으로 현재 경기도 광주지역의 도자 문화는 새롭게 꽃피우게 된다.

1947년 분원리 면장들의 분원 복원 움직임

1950년대 광주 분원리

1950년대 한국미술품연구소 시연

1960년대 전승 도자 공방 가마구조

 광주 전승 도자의 선구자 중 가장 독보적인 인물로 꼽는다면 경기도 무형문화재 백자 사기장 안동오와 경기도 무형문화재 분청사기장 한창문 이다. 고 안동오는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중퇴하고 일본의 인간 국보인 가토 고조를 통해 도자 연구를 시작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한국미술품연구소 등지에서 근무한다. 60년대 초 광주 남종면에 민속 도자기 번천요를 설립하여 그의 백자는 당시 최고 가격에 거래되었으며 공방의 직원이 약 1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제작 공정에 있어 분업화를 거친다. 그러던 중 90년대 초반 안동호가 고인이 되면서 공방이 해체되었고 이후 소속 장인들은 분원 말기와 같이 전국으로 흩어진다.

 장인 중에서 젊은 나이에 속한 지평 한기석은 안동오에게 기술을 전수 받아, 물레 성형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가진 장인으로 정평 나 있었다. 그의 집안은 오래전 조선 왕실이 설립한 사옹원 분원의 도편수 집안의 후손으로 부친인 고 한창호는 해방 전 일본인 도자공방과 해방 후 한국미술품연구소와 조형 문화연구소 등지에서 인정받은 장인이었다. 집안의 가업을 이은 한기석은 이후 작업 기량을 높이고자 경기도 광주, 이천의 도자 공방에서 수련하였고 1997년 가업인 조선백자 제작을 이어 가고자 지평도예를 설립하게 되는데 한기석 집안은 1대 한영석, 2대 한 치수 3대 한태석 4대 한창호의 전수계보를 가진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무명도공의 비 제막식 안내문

백자철화포도원숭이문항아리

 2018년 현재 경기도 광주의 조선 시대 가마터는 약 480개소로 국가 사적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 밖에 현재 운영 중인 도자 공방은 약 60개소, 그리고 조선백자를 전승하는 요장은 그중 약 10% 미만인 8개소 정도로 조선백자를 전승하는 요장은 크게 줄고 있다.
경기도 광주지역의 도자문화는 조선 왕실 분원으로부터 도자의 역사가 시작된 이례 근현대의 고단함을 이기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젊은 전수자들의 새로운 도전을 요구받고 있다.

월정도예원 한석기 장인

  1. 김영원,분원의 설치를 중심으로 한 조선전기의 도자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 논문, 1995)
  2. 왕실 인사 중 도제조를 지낸 대표적인 인물이 연잉군, 훗날 영조이다.
  3. 經國大典』권2 사전 司饔院 條 “官制 都提調貿大君王子君備應”
  4. 1947년 광주 지역 유지 몇 사람과 남종면 전 현직 면장들이 분원을 복원하려 100만 원의 성금을 모으다. (1947년 동아일보 기사)